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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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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황제는 1871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국가 원수 칭호이다. 이 칭호는 1806년 멸망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칭호에서 유래되었으며, 프로이센 국왕이 겸임했다. 1848년 혁명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독일 황제' 칭호가 제안되었으나 거절되었고, 1871년 보불전쟁 승리 후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 칭호를 받아들여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다. 초대 황제 빌헬름 1세는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으로, 비스마르크의 주도하에 독일 제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지만, 그의 보수적인 정책은 사회적 불만을 야기했다. 빌헬름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며 퇴위했고, 독일 제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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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황제
기본 정보
마지막 재임 황제 빌헬름 2세,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공식 명칭독일어: Deutscher Kaiser
발음ˈdɔʏtʃɐ ˈkaɪzɐ
통치
스타일폐하 (His Imperial Majesty)
거주지베를린 왕궁
신궁 (포츠담)
임명 방식세습
역사
시작1871년 1월 1일
종료1918년 11월 28일
상징
제국 국장
황제기
기타
마지막 황제빌헬름 2세
마지막 황제의 퇴위퇴위
현재 Pretender게오르크 프리드리히

2. 역사

빌헬름 1세프랑스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의 탄생을 선포하는 모습.


"독일 황제"라는 작위명은 프로이센의 총리이자 북독일 연방의 연방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신중하게 고른 것이었다. 황제로 추대된 빌헬름 1세는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인이었고 제위를 만들고 오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제안된 "독일인의 황제" 칭호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기에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빌헬름 1세는 자신이 신의 대행하는 군주이지 국민군주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거부했다. 빌헬름 1세는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를 칭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칭호는 독일 제국을 구성할 다른 제후국들이 법적으로 빌헬름 1세의 신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의를 얻기 힘들었으며, 외국의 독일어권 영토(오스트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 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가 제시되었고 빌헬름 1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면서 북독일 연방독일 제국으로 바뀌었다. 독일 제국은 연방군주제 국가였다. 황제는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연방에 가맹한 군주들 중 필두인 의장(president)의 위치에 있었다. 제국 헌법 하에서, 제국은 프로이센 국왕이 의장직을 독점하는 연합국가로 규정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헌법에서 "연합 의장(President of the Confederation)"으로 규정되었는데, 즉 국가연합의 의장인 황제직은 프로이센 국왕직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 이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서는 퇴위하나 프로이센 국왕위는 유지하면서 동군연합으로 군주제를 유지하려던 계획은 이 헌법 조항 때문에 불가능해졌다.[8]

독일 황제의 칭호는 1806년에 소멸한 신성 로마 제국 군주의 공식 칭호인 "로마왕" 혹은 "신성 로마 황제"에서 기원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군주를 의식하고 있다.

2. 1. 기원

1848년 혁명의 여파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부터 "독일인의 황제"(Kaiser der Deutschende)라는 칭호를 제안받았지만, "의회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16]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에 따라 독일 군주들만이 그러한 제안을 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민주적인 프랑크푸르트 헌법을 싫어하여 제관을 거부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제안되었던 "독일인의 황제"는 빌헬름 1세가 스스로를 신성 군주권에 의해 통치하고, 인민이 아닌 "신의 은총으로" 선택된 국왕으로 여겼기 때문에 기각되었다.[3]

"독일 황제"라는 칭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프로이센의 총리 대신이자 북독일 연방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파리 포위 중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선포하기까지의 논의를 거쳤다.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를 선호했지만, 1월 18일 마지못해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독일 황제"라는 칭호는 남부 독일 군주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영토 주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토 밖의 땅(오스트리아 제국,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2]

빌헬름 1세는 자신은 독일인보다 먼저 프로이센인이라고 하면서 독일 황제의 칭호를 칭하는 것에 강하게 저항했고, 독일 연방의 모든 제후들이 동의하고 나서야 황위에 즉위하고 황제의 칭호를 칭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로이센 국왕임을 고집했다. 빌헬름 1세는 "대통령"(Präsidentde) 혹은 "전 독일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대통령"의 호칭에 대해서는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이나 뷔르템베르크의 국왕이 자신보다 상위의 칭호를 가진 자에게만 복종하려 했기 때문에 외교 의례상 부적절했으며, 또 "전 독일 황제"라고 하면 1866년의 보오 전쟁 패배로 인해 독일 연방에서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를 영유하고 있기에 자국을 독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칭호를 둘러싸고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라는 타협적인 칭호를 사용하도록 설득했다. 비스마르크는 외교적 압력과 베르프 가문에서 마련한 뇌물을 이용하여, 남부 독일 최대의 왕국인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서한을 쓰게 하였다. 루트비히 2세는 그 안에서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를 칭하도록 요청했다. 황제 대관식 때, 바덴대공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으로 "빌헬름 황제 만세"라고 외쳤는데, 어떤 황제인지를 명시하지 않은 채 고창함으로써 빌헬름 1세의 저항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 대관식은 1871년 1월 18일, 독일 연방군이 점령 중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거행되었다. 빌헬름 1세는 취임 연설에서 소멸된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련에 언급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의 황제와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2. 독일 제국 성립 (1871년)



"독일 황제"라는 칭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대신이자 북독일 연방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파리 포위 중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선포하기까지의 논의를 거쳐 이 칭호를 결정했다.[1][2]

빌헬름 1세는 처음에는 "독일 황제" 칭호를 칭하는 것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대통령"(Präsidentde) 혹은 "전 독일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통령" 칭호는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이나 뷔르템베르크 국왕이 자신보다 상위의 칭호를 가진 자에게만 복종하려 했기 때문에 외교 의례상 부적절했다. 또한 "전 독일 황제"라고 하면, 1866년 보오 전쟁 패배로 독일 연방에서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를 영유하고 있어 자국을 독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칭호를 둘러싸고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여파와 독일 제국 (1848–1849) 기간 동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부터 "독일인의 황제"(Kaiser der Deutschende)라는 칭호를 제안받았지만, "의회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16]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에 따라 독일 군주들만이 그러한 제안을 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라는 타협적인 칭호를 칭하도록 종용했다. 그는 외교적 압력과 베르프 가문의 자금에서 마련한 뇌물을 이용하여, 남부 독일 최대의 왕국인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서한을 쓰게 하여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를 칭하도록 요청했다.

빌헬름 1세는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를 선호했지만, 1월 18일 마지못해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이 칭호는 남부 독일 군주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영토 주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토 밖의 땅(오스트리아 제국,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2]

황제 대관식은 1871년 1월 18일, 독일 연방군이 점령 중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거행되었다. 황제 대관식 때, 바덴대공프리드리히 1세가, 처음으로 "빌헬름 황제 만세"라고, 어떤 황제인지를 명시하지 않은 채 고창함으로써, 빌헬름 1세의 저항을 회피하는 데 이르렀다. 빌헬름 1세는 취임 연설에서, 소멸된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련에 언급했지만, 신성 로마 · 독일 양 제국의 황제와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면서 북독일 연방독일 제국으로 이행했다. 독일 제국은 연방군주제 국가였다. 황제는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연방에 가맹한 군주들 중 필두인 의장(president)의 위치에 있었다. 제국 헌법 하에서, 제국은 프로이센 국왕이 의장직을 독점하는 연합국가로 규정되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제국의 종말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독일 제국은 멸망하고 빌헬름 2세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독일 황제의 칭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국왕 자격은 유지하면서 독일 황제 자리에서만 물러나려 했으나, 제국 헌법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했다.[8]

빌헬름 2세는 자신이 프로이센과 인신 연합 형태로 독일 제국을 다스린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독일 황제 자리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프로이센 국왕 자리는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8]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재상이었던 바덴 공 막스는 이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1918년 11월 9일, 휴전이 맺어지기 이틀 전, 베를린에서 혁명 운동이 거세지자 막스는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 자리에서 모두 물러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9]

빌헬름 2세는 군대가 자신의 왕위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상황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날 밤 늦게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1월 28일이 되어서야 빌헬름 2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두 왕위를 모두 포기하고 "프로이센 왕위와 그에 관련된 독일 제국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인정했다.[10]

3. 황제의 권한과 역할



독일 제국은 연방군주제 국가였다. 황제는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연방에 가맹한 군주들 중 필두인 의장(president)의 위치에 있었다. 제국 헌법 하에서, 제국은 프로이센 국왕이 의장직을 독점하는 연합국가로 규정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헌법에서 "연합 의장(President of the Confederation)"으로 규정되었는데, 즉 국가연합의 의장인 황제직은 프로이센 국왕직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 이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서는 퇴위하나 프로이센 국왕위는 유지하면서 동군연합으로 군주제를 유지하려던 계획은 이 헌법 조항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4. 역대 황제



  • 1888년 3월 9일
    (90세)1871년 1월 18일1888년 3월 9일호엔촐레른1866년부터 북독일 연방 의장 역임
    프리드리히 3세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
    (56세)1888년 3월 9일1888년 6월 15일호엔촐레른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82세)1888년 6월 15일1918년 11월 9일
    (폐위됨)호엔촐레른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1세의 손자

4. 1. 빌헬름 1세 (1871년 - 1888년)



"독일 황제"라는 칭호는 프로이센의 총리이자 북독일 연방의 연방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황제로 추대된 빌헬름 1세는 봉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황제 자리에 즉위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제안했던 "독일인의 황제" 칭호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기에, 왕권신수설을 믿었던 빌헬름 1세는 자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여겼고 국민군주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 칭호를 거부했다.[15]

빌헬름 1세는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를 원했다. 그러나 이 칭호는 독일 제국을 구성할 다른 제후국들이 법적으로 빌헬름 1세의 신하가 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동의를 얻기 어려웠고, 오스트리아,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외국 독일어권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결국 타협안으로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가 제시되었고, 빌헬름 1세는 마지못해 이를 수용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후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면서 북독일 연방독일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독일 제국은 연방군주제 국가였다. 황제는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연방에 가맹한 군주들 중 가장 높은 위치인 의장(president) 역할을 맡았다. 제국 헌법에 따르면, 제국은 프로이센 국왕이 의장직을 독점하는 연합국가로 규정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헌법에서 "연합 의장(President of the Confederation)"으로 명시되었는데, 이는 국가연합의 의장인 황제 직위가 프로이센 국왕 직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후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서는 퇴위했지만 프로이센 국왕 지위는 유지하면서 동군연합으로 군주제를 유지하려던 계획은 이 헌법 조항 때문에 실패했다.

초상이름생몰즉위퇴위가문비고
빌헬름 1세 1797년 3월 22일
-
1888년 3월 9일
(90세)
1871년 1월 18일1888년 3월 9일
30px
호엔촐레른
1866년부터 북독일 연방 의장으로서 헌법상 규정된 황제와 위상과 역할이 사실상 같았음


4. 2. 프리드리히 3세 (1888년)



'''프리드리히 3세'''(1831년 10월 18일 ~ 1888년 6월 15일)는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으로, 빌헬름 1세의 아들이다. 1888년 3월 9일에 즉위하여 1888년 6월 15일까지 99일 동안 재위했다.[15]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적 성향과 개혁 정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통치했다면 독일 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4. 3. 빌헬름 2세 (1888년 - 1918년)



'''빌헬름 2세'''는 1859년 1월 27일에 태어나 1941년 6월 4일에 사망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 인물이다.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자 빌헬름 1세의 손자였다. 1888년 6월 15일에 독일 황제로 즉위하여 1918년 11월 9일 폐위될 때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독일 제국의 급격한 성장과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빌헬름 2세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과 군비 확장은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켰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의 제국주의적 정책과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5. 독일 황제의 칭호와 상징

신성하고 왕족이신 폐하 빌헬름 1세, 신의 은총으로,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 변경백 브란덴부르크, 뉘른베르크 부르크백 ; 호엔촐레른 백작; 실레지아와 글라츠 백국의 주권자이자 최고 공작; 니더라인 및 포젠의 대공; 작센, 베스트팔렌, 앙그리아, 포메라니아, 뤼네부르크,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헬레, 클레페, 율리히 및 베르크 공작, 빈트족과 카슈브 공작, 크로센, 라우엔부르크 및 메클렌부르크; 헤센과 튀링겐의 방백; 상부 및 하부 루사티아의 변경백; 오렌지 공 ; 뤼겐, 동프리지아, 파더보른과 피르몬트, 할버슈타트, 뮌스터, 민덴, 오스나브뤼크, 힐데스하임, 베르덴, 카민, 풀다, 나사우 및 모어스의 공작; 헨네베르크의 마르크, 라벤스베르크, 호엔슈타인, 테클렌부르크 및 링겐, 만스펠트, 지크마링겐 및 베링겐의 백작; 프랑크푸르트의 영주.[13]

독일 황제의 칭호는 1806년에 소멸한 신성 로마 제국 군주의 공식 칭호인 "로마왕" 혹은 "신성 로마 황제"에서 기원했으며, 그 칭호에서도 분명히 신성 로마 제국 군주를 의식하고 있다.

빌헬름 1세는 처음에는 자신이 독일인보다 먼저 프로이센인이라고 생각하여 독일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독일 연방의 모든 제후들이 동의한 후에야 황위에 즉위하고 황제 칭호를 사용했지만, 여전히 프로이센 국왕임을 강조했다. 빌헬름 1세는 "대통령"(Präsidentde) 혹은 "전 독일 황제"(Kaiser von Deutschlandde)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통령" 칭호는 남부 독일의 바이에른이나 뷔르템베르크 국왕들이 자신보다 상위 칭호를 가진 자에게만 복종하려 했기 때문에 외교 의례상 부적절했다. 또한 "전 독일 황제"는 1866년 보오 전쟁 패배로 독일 연방에서 제외되었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를 영유하며 자국을 독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칭호 마찰을 야기할 수 있었다.[16]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de)라는 타협적인 칭호를 사용하도록 설득했다. 동시에 외교적 압력과 베르프 가문의 자금으로 마련한 뇌물을 이용하여 남부 독일 최대 왕국인 바이에른의 국왕 루트비히 2세에게 서한을 쓰게 하여 빌헬름 1세에게 "독일 황제" 칭호를 요청하도록 했다. 황제 대관식 때 바덴대공 프리드리히 1세가 "빌헬름 황제 만세"라고 어떤 황제인지 명시하지 않고 외침으로써 빌헬름 1세의 저항을 회피했다.[17][18]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German Empire https://books.google[...] Merkaba Press 2017-07-14
[2]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Band III: Bismarck und das Reich W. Kohlhammer
[3] 서적 Germany: 1789–1933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Deutsche Rechtsgeschichte Böhlau/UTB
[5]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Vom Alten Reich bis Weimar (1495–1934)
[6] 서적 Das Staatsrech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Band V: Die geschichtlichen Grundlagen des deutschen Staatsrechts. Die Verfassungsentwicklung vom Alten Deutschen Reich zur wiedervereinigten Bundesrepublik Deutschland C.H. Beck
[7] 간행물 Tenure and Powers of the German Emperor https://www.jstor.or[...] 1888
[8] 서적 The Kaiser's Memoirs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Publishers
[9] 웹사이트 Wilhelm II, German Emperor https://encyclopedia[...] Freie Universität Berlin 2016-03-10
[10] 문서 Statement of Abdication of Wilhelm II
[11] 웹사이트 Wilhelm II, Emperor of Germany (1859–1941) http://regiments.org[...] 2022-01-11
[12] 서적 Die Titel und Wappen des preußischen Königshauses Berlin
[13] 웹사이트 Titles of Frederick III http://regiments.org[...]
[14] 웹사이트 Titles of Wilhelm II http://regiments.org[...]
[15] 문서 Enumerated as successor of Frederick II who was King of Prussia 1740–1786 but not German Emperor.
[16] 문서 "成瀬・山田・木村(1996) 2巻"
[17] URL https://web.archive.[...]
[18] 서적 Die Titel und Wappen des preußischen Königshauses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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